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7세 (문단 편집) === 사망 === 956년, 콘스탄티노스는 환관 수도자 폴리에욱토스를 총대주교에 임명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총대주교에 임명된 뒤 분란을 유발시켰다. 시종장 바실리오스를 탐관오리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가 하면, 레온 6세의 4번째 결혼 문제를 다시 제기하더니 레온 6세의 결혼을 승인해준 에우테미오스 총대주교의 이름을 딥티코스[*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세계 정교회 독립교회 주교들의 명단이다. [[성찬예배]] 중에 [[보제]]가 큰소리로 낭송하는데, 세계 각지 여러 정교회들과 영적으로 연대하고 기억한다는 뜻이다.]에 등재하라고 요구했다. 콘스탄티노스는 내심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걸 원했지만 이제와서 모든 사안을 다시 끄집어 내는 걸 원하지 않았다, 폴리에욱토스의 행동으로 시끄러워지자, 콘스탄티노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959년 9월 아시아로 건너가 키지쿠스의 주교를 만나 총대주교를 몰아낼 방법을 논의했다. 그후 그는 부르사로가서 그곳의 유명한 온천 목욕으로 고질적인 열병을 치료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이 없자, 그는 도시에서 35km 쯤 떨어진 미시아의 올림푸스 산 기슭에 있는 [[수도원]]으로 갔다. 그러나 그의 병세는 이 무렵에 호전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그는 황급히 수도로 돌아온 후 959년 11월 9일 황후 엘레니, 5명의 황녀, 그리고 아들 [[로마노스 2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54살의 나이로 붕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